디자이너 커리어에 관한 생각

얼마 전 디자이너 영화님을 통해 오픈 커피챗을 열어볼 기회가 있었다. 오픈 커피챗이라는 말이 생소했는데 요지는 내 경력을 소개하고 나와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분들을 신청받아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5명이라도 신청해 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70명 가까이 신청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커피챗 신청을 받을 때 신청서를 통해 어떤 내용을 나누고 싶은지, 하는 일은 무엇이고 몇 년간 디자이너로 일해왔는지 물어봤다. 신청을 받아보니 연차와 업계(스타트업, 대기업 등)를 떠나 모든 사람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 고민은 내가 해왔던 고민과도 일치했다.

몇 가지 공통적인 질문에 관한 내 생각을 전하며, 대체 ‘좋은 커리어’란 무엇일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좋은 디자인을 하고 있는게 맞을까요

개인적으로 PM, 개발 직군에 비하면 디자이너에게는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 논의할 창구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PM에게는 좋은 제품이 무엇인지, 어떻게 제품 팀을 이끌어야 하는지, 좋은 제품팀은 무엇인지에 관한 자료가 넘쳐난다. 대표적으로 SVPG, YC의 아티클만 읽어도 제품과 제품 팀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고, Lenny’s Letter만 봐도 업계의 표준이 될 만한 수치 등 다양한 벤치마크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개발자들은 소프트웨어 공학에서 다루는 여러 문제와 해결책이 비교적 구조화가 되어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또한 개발자들을 보면 X나 Geek News와 같은 커뮤니티에서 활발한 대화와 정보 공유 또한 이어나간다.

반면에 디자이너에게는 정보가 부족하다. 단적으로 테크 기업 블로그 중에는 디자인 블로그보다 기술 블로그가 훨씬 많다. 디자인에 관한 소수의 블로그에서조차 디자인 시스템, 피드백을 주고 받는 문화, 디자인을 해오는 과정과 같은 주제에 국한되어있고 어떤 디자인을 좋다고 볼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이야기는 찾기 어렵다. (혹시 있다면 저도 좀 알려주세요) 기업에서 주최하는 컨퍼런스 중 단독으로 디자인에 관해 다루는 컨퍼런스는 아마도 토스의 디자인 컨퍼런스가 거의 유일한 듯한데 한 회사의 디자인 원칙이 업계 전반에 통용될 만한 좋은 디자인의 기준을 대변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궁극적으로는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 디자이너 간에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일단 현실적인 해결책으로는 스스로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 찾아가 보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나의 경우 답을 내리는 것에 아래 방법들이 도움이 되었다.

디자인 케이스 스터디 찾아보기
유명 웹/앱의 디자인을 뜯어보며 어떤 원리를 적용한 것인지, 어떤 것이 좋고 좋지 않은지를 설명하는 사이트가 있다. 특히 UX 심리학의 개념들을 하나씩 읽어보면 디자인의 백그라운드 지식을 쌓는데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 이런 시도를 국내에서 하고 싶어서 준비 중이기도 하다.)

제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어떤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내가 속한 제품이 어떤 산업에 속해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YC에서 발행한 아티클에서는 각 비즈니스 모델별로 어떤 지표를 봐야 하는지가 잘 나와 있는데, 어떤 디자인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해야 하는 지표를 알면 우리 팀과 디자이너 개인 역시 어떤 디자인을 좋은 디자인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우리 회사는 세련된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데 제 포트폴리오 괜찮을까요?

또 다른 공통적인 고민은 디자이너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디자인 과정과 실제 회사에서 일하는 과정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UT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저희 회사는 그럴 기회가 없어요’, ‘문제 해결 방식이 아니라 탑다운으로 내려오는 일을 쳐내고 있어서 좋은 디자인인지 모르겠어요’와 같은 고민이 있었다.

이상적으로는 디자이너들이 사용자를 만나며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게 임팩트가 있는지 판단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거나 백로그에 추가하며 제품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완벽히 이런 방식으로만 일할 수 있는 회사는 아주 확실성이 높은 시장에서 경쟁사 없이 단순히 고객 만족만을 목표로 할 때 매출이 함께 성장하는, 아주 이상적인 회사여야만 가능할 것이다. 즉, 이상적인 방식으로만 일할 수 있는 회사는 없다는 소리다.

많은 경우 특정한 시장의 기회(예를 들어 마케팅 시점 등)를 맞추기 위해 빠르게 제품을 만들어야 할 때도 생기고, 외부 계약이 얽혀 있어서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미리 개발을 해둬야 할 때도 생기고, (누구도 원치 않지만) 외부의 압박으로 보여주기식 기능 개발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럼 이게 다 틀렸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품의 최종 목표는 회사도, 나도, 사용자도 잘 먹고 살 사는 것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떨 때는 영업이 우선할 때가 있고, 어떨 때는 마케팅이 우선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사용자 만족이 중요할 때가 있다. 그 상황의 필요성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는 팀이 더 오랫동안 좋은 제품을 만들 가능성이 훨씬 크다.

지금 제품의 매출을 내는 것이 중요한지, 더 많은 고객을 데려오는 게 중요한지, 경쟁사 대비 무수히 많은 기능을 찍어내는 게 중요한 상황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춰 디자인 방식을 바꾸는 노련함 역시 필요하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증명해 내고, 그 노력을 어필하는 것이 더 성숙한 디자이너에게 기대하는 모습일 것이다.

성과를 증명할 데이터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할까요

디자인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데이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모든 회사에 그런 체계가 잘 마련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 스타트업은 충분한 사용자가 없어서 데이터를 보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고, 어떤 곳에서는 데이터를 보는 시스템을 구축할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

내 생각에 데이터 드리븐 디자인의 핵심은 디자인에 대해 피드백을 받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제품을 개선해야 한다는 검증과 회고에 있다. 데이터에 근거한 디자인이 핵심이지, 반드시 그 데이터가 숫자여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꼭 정량적 데이터가 아니더라도 정성적인 피드백을 받아보는 것만으로도 디자인의 성과를 증명해 볼 수 있다. 폴 그레이엄은 초기 제품의 경우 소수의 고객이 눈물 흘릴 만큼 좋은 제품을 만드는 걸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닐슨 노먼 역시 5명의 사용자만 테스트해봐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즉, 좋은 디자인임을 확신하는데 반드시 우리가 상상하는 그 ‘데이터’가 필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초기 뱅크샐러드도 이러한 원칙에 공감해 소수의 가계부 사용자가 느끼기에, 없어진다면 너무 슬퍼할 것 같은 서비스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했다.

정성적인 검증 방법을 통해 디자인의 임팩트를 증명했다면, 회고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함께 일한 동료들과 회고를 진행해 볼 수도 있고, 이번 개선을 하면서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나에게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었고 그걸 충족했는지, 좋은 팀원이 되기 위해 어떤 점을 개선하면 좋겠는지 등을 피드백 받아 볼 수도 있다. 좋은 디자이너는 동료와 함께 제품을 만들어가고, 좋은 디자인은 팀을 동기 부여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으로 디자인의 성과를 바라보고 레슨런을 쌓아간다면 ‘이 사람은 어디서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좋은 커리어란 무엇일까

끝으로, 모든 질문과 고민의 가장 근원적 이유는 ‘좋은 커리어를 쌓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나 역시 너무 막막하고 항상 고민이 된다. 다만 요즘 가지고 있는 생각은 커리어란 어떻게 이어나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 이력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다. 이걸 어떻게 레버리지 삼을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 고민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자산이 될 때가 많다.

최근에 운좋게도 커리어 고민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만났다. 한기용님의 ‘실패는 나침반이다’라는 책이다. 공감이 갔던 구절 몇 개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커리어는 더 이상 위로만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다. 사다리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던 세상에서나 가능했다. 요즘 커리어의 방향성은 위, 아래, 옆으로 모두 트인 정글짐에 가깝다. - 37쪽
시작점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서 마무리하느냐, 그 여정이 훨씬 중요해진다. 커리어를 한 방에 끝내려 하지 말자. 내가 잘하는지, 재능이 없는 게 아닐지 자꾸만 의문을 품지 말고 1년, 2년, 5년 그냥 쭉 해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장 마인드셋의 본질이라고 본다. - 53쪽
꾸준히 좋은 평판과 네트워크를 쌓는 복리 활동이 커리어 후반기를 뒷받침해줬다. 결국 커리어는 좋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걸 명심하자. -70쪽

다음 주부터 몇몇 분들과는 온라인으로 커피챗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실제로 만나보면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커피챗이 나에게도 좋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줘서, 앞으로도 종종 이런 오픈 커피챗을 열어볼 생각이다.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Read more

확실한 말을 하는 사람

나는 확실한 말을 하는 사람이고자 한다. 져주는 듯이, 내가 잘못을 그럴 수밖에 없었던 듯이 흘려보내는 것은 너무 쉽다. 어른이라면 이 정도로 알아듣고 넘어가자는 태도로 성숙하게 ‘그땐 그렇게 말하셔서 이런 뜻인 줄 알았어요’, ‘알겠어요, 그건 제가 오해한 게 맞는 것 같네요’. 라고 말하면 된다. 그럼 적당히 체면을 깎지 않는 선에서 ‘나는

규격에서 벗어나기

얼마 전에 이사했다. 이전 집과 주방 구조가 특히 달라 고민했다. 냉장고 옆자리에 김치냉장고를 넣을 만한 자리가 있는데 난 김치냉장고 안 쓰니까 그곳에 원래 쓰던 전자레인지 수납장을 놓으면 되겠거니 계획했다. 미리 폭의 크기를 재어보는 꼼꼼함까지 부렸는데 막상 가져와서 설치하니 애매했다. 폭만 맞고 뒤에 공간이 남았다. 30센티 정도.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뒤에

좋아서 쓰는 제품

이번 주말에는 현대카드에서 주최하는 이벤트인 다빈치 모텔에 다녀왔다. 언제부터 현대카드를 썼더라. 대학생 때 외국 디자인 서적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가고 싶어서 현대카드를 만들었다. 그땐 어렸을 때라 연회비가 가장 싼 카드를 골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고메위크에 관심이 갔고(번번이 예약은 실패했지만), 예쁜 카드 플레이트를 갖고 싶었고, 코스트코가 필요했고,

똑똑한 디자이너에 대한 환상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이 똑똑함이라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이 진짜 능력이다. 디자이너에게도 마찬가지다. 제품 전략을 세우기 위해 시장을 면밀하게 분석한 자료, 빈틈없는 경쟁사 비교를 몇 페이지에 나눠 설명을 듣고 있으면 너무 많은 숫자와 그래프에 압도당해 그걸 잘 이해하는 사람이 똑똑한 디자이너인 것 같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래서 해결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