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한 비행

발리로 여행을 간다. 인도네시아를 동남아라는 느슨한 범주에 넣어버리고 비행시간을 얕잡아봤는데 총 6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긴 거리였다. 장시간 비행에 나름대로 대비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옆자리 고수들을 보면 또 한 수 배운다. 이번에 깨달은 바를 더해 80cm의 좁은 공간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방법을 적어본다.

소지품의 적절한 안배

일단 비행용 파우치와 작은 가방은 필수다. 큰 가방은 선반 위에 넣어버리고 발 앞에 둘 작은 사이즈의 가방은 꼭 소지하고 있어야 이것 저것 넣고 빼기 쉽다. 이번엔 백팩을 들고 가서 아주 편했다. 앞에 둘 가방은 흐물거리는 형태보단 바닥에서도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형태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가방 안에는 노트북이나 책을 넣어두고 필요할 때 꺼낸다.

파우치도 있어야 한다. 파우치에 개인 위생용 도구를 따로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칫솔 치약 (혹은 리스테린), 클린징 티슈가 있으면 좋다. 비행기 안은 좁으므로 클린징 티슈는 되도록 탑승 직전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것도 좋겠다. 들어가기 전 메이크업은 지우고 수분 크림을 듬뿍 바르고 타면 비행기 안 건조함과 싸울 무기다 된다. 바르고 자는 슬리핑 팩이 있다면 그것도 좋다. 파우치는 가방에 넣든 꺼내서 두든 상관없지만, 만약 따로 둔다면 끈이 있는 형태가 좋다. 대부분 비행기에는 옷을 거는 용도의 고리가 있다. 옷걸이 그림이 무색하게 무척 작지만, 옷 대신 파우치를 걸어두면 제격이다.

컨디션 관리

그 다음 중요한 건 기내 건강이다. 나는 정말 비행기만 타면 건조함을 견디질 못한다. 얼굴은 수분 크림이나 팩으로 어떻게 해결한다 하더라도 목과 코가 따가워 오는 것은 처치곤란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공항 약국에서 목 칙칙, 코 칙칙을 구매하는 편이다. (명칭은 나잘 스프레이이다.) 스프레이는 식염수가 주 성분이라 향은 없이 촉촉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코감기 용으로 나온 제품은 항 히스타민과 알싸한 향이 있다. 잘 골라서 구매해야한다. 이번엔 감기용으로 나온 것을 잘못 골라 촉촉하지만 매웠다. 목도 동일하다. 목감기용으로 나온 것은 좀 더 맵다. 눈 건조를 보호하는 인공 눈물도 덤으로 챙기면 좋겠다. 주로 잠을 자는 편이라면 발열 눈 안대를 쓰는 것도 방법이다. 아무래도 따뜻하게 눈을 감고 있으면 심각한 건조는 막아준다.

이번에 새로 시도해본 아이템이 있는데 바로 ‘가습 마스크'다. 일반 일회용 마스크와 동일하게 생겼는데 안에 광대 위치쯤에 물을 흡수할 수 있는 솜을 껴넣는 슬롯이 장착되어있다. 솜에 약간의 물을 적시고 껴 넣으면 물이 증발하면서 습기를 더해주는 자연스러운 원리다. 아주 효과적이진 않았는데 그래도 비행 중반을 넘어가니까 없는 것보단 나았고, 후반부에 갈 수록 물을 더 넣을 정도로 아주 절실한 아이템이 되었다.

이건 이번에 알게된 또 다른 새로운 무기가 있다. 잘 때 다리의 붓기를 빼준다는 압박 스타킹이다. 비행기에 타길 기다리면서 탑승구 앞에 서 있는데 내 앞에 머리를 모두 묶어 올리고 타이트한 상의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어서 누가봐도 무용을 할 것 같은 의상을 입은 두 여성이 바지 안에 압박 스타킹을 입고 있는 것을 봤다. 비행 시간이 길어지면 몸이 붓는데 맞다, 저걸 하면 좋겠다 싶었다. 아직 시도는 안해봤지만 다음에 꼭 시도해볼 예정이다.

제한적 여유 시간

아이템을 모두 장착했다면 이제 비행 시간을 어떻게 보낼것인지 생각해봐야한다. 원래는 주로 넷플릭스를 담아갔는데 이번에는 다른 것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비행기만큼 딴 짓이 제한된 곳이 없다. 꼭 읽어야 하는 아티클, 써야 하는 글을 정해두고 나름의 챌린지를 만들어보기로했다. 이번에 각각 38페이지, 12페이지의 아티클을 읽기로 했는데 2시간만에 해버려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꼭 해야하는 일이 있고 그게 어느정도 도전 의식이 생기는 난이도라면 긴 비행시간도 “이제 3시간 밖에 안남았네! 어서 속도를 높여야겠어.”하는 생각이 들어서 남은 비행시간이 그렇게 막막하지 않다.

이것도 아직 시도는 안해봤는데 음악 앨범을 쭉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몇 악장씩 되는 클래식도 좋을 것 같고 다들 명반이라고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서 좀 더 여러 번 들어 보고는 싶은데 자꾸 음악 들으면서 인스타그램을 하게 된다면 비행기가 딱 좋은 장소다. 여기선 가능한 콘텐츠가 많지 않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인스타 보면서 음악듣기, 티비 보면서 유튜브 찾기같은 멀티테스킹을 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에 집중해야한다.

준비가 잘 되어있다면 비행기 안처럼 생산적인 공간이 없다. 얼마나 생산적이면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을까. 평소같으면 이런 얘기 나중에 써야지 하고 메모만 남겨뒀을 거다. 그러면서도 드는 솔직한 생각은 이런거 다 됐고 그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비지니스 석에 눕고 싶다는 마음이다. 그 곳에서 웰컴 샴페인을 마시면서 글을 쓰든, 음악을 듣든, 뭘 하든 얼마나 고상하겠는가. 이렇게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싶다는 동기부여까지 할 수 있다니. 그리고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아직 2시간이나 남았다니! 아무래도 비행기는 최고로 생산적인 장소인 것 같다.

Read more

확실한 말을 하는 사람

나는 확실한 말을 하는 사람이고자 한다. 져주는 듯이, 내가 잘못을 그럴 수밖에 없었던 듯이 흘려보내는 것은 너무 쉽다. 어른이라면 이 정도로 알아듣고 넘어가자는 태도로 성숙하게 ‘그땐 그렇게 말하셔서 이런 뜻인 줄 알았어요’, ‘알겠어요, 그건 제가 오해한 게 맞는 것 같네요’. 라고 말하면 된다. 그럼 적당히 체면을 깎지 않는 선에서 ‘나는

규격에서 벗어나기

얼마 전에 이사했다. 이전 집과 주방 구조가 특히 달라 고민했다. 냉장고 옆자리에 김치냉장고를 넣을 만한 자리가 있는데 난 김치냉장고 안 쓰니까 그곳에 원래 쓰던 전자레인지 수납장을 놓으면 되겠거니 계획했다. 미리 폭의 크기를 재어보는 꼼꼼함까지 부렸는데 막상 가져와서 설치하니 애매했다. 폭만 맞고 뒤에 공간이 남았다. 30센티 정도.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뒤에

좋아서 쓰는 제품

이번 주말에는 현대카드에서 주최하는 이벤트인 다빈치 모텔에 다녀왔다. 언제부터 현대카드를 썼더라. 대학생 때 외국 디자인 서적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가고 싶어서 현대카드를 만들었다. 그땐 어렸을 때라 연회비가 가장 싼 카드를 골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고메위크에 관심이 갔고(번번이 예약은 실패했지만), 예쁜 카드 플레이트를 갖고 싶었고, 코스트코가 필요했고,

똑똑한 디자이너에 대한 환상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이 똑똑함이라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이 진짜 능력이다. 디자이너에게도 마찬가지다. 제품 전략을 세우기 위해 시장을 면밀하게 분석한 자료, 빈틈없는 경쟁사 비교를 몇 페이지에 나눠 설명을 듣고 있으면 너무 많은 숫자와 그래프에 압도당해 그걸 잘 이해하는 사람이 똑똑한 디자이너인 것 같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래서 해결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