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쓰는 제품

이번 주말에는 현대카드에서 주최하는 이벤트인 다빈치 모텔에 다녀왔다. 언제부터 현대카드를 썼더라. 대학생 때 외국 디자인 서적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가고 싶어서 현대카드를 만들었다. 그땐 어렸을 때라 연회비가 가장 싼 카드를 골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고메위크에 관심이 갔고(번번이 예약은 실패했지만), 예쁜 카드 플레이트를 갖고 싶었고, 코스트코가 필요했고, 슈퍼 콘서트를 가고 싶었다. 나의 참여도(Engagement)와 비례해서 연회비도 증가했다. 최근엔 (내 기준 엄청 비싼 카드인) 레드를 받을까 말지 고민 중이다.

행사는 기대보다 다채로웠다. 근처 바, 레스토랑과 연계해서 쿠폰을 주는 것도 쏠쏠했고 한남동 일대가 축제 분위기인 것도 즐거웠다. 공연과 강의로 지루해진 내 일상에 영감을 가득 부어주었다. 한껏 힙해진 기분. 반나절을 즐기고 오니 현대카드의 안목과 취향에 매료되었다. 더 비싼 카드로 바꿔도 아깝지 않겠다, 아니지 더 바우처 금액이 커지니 오히려 혜택이려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계산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브랜드는 어떤 가치일까. 숫자로 계산되지도 않고, 바로 효용이 드러나지도 않는데 어떻게 팀을 설득할 수 있고 어떻게 실행을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고객을 타깃 광고로 데려올 수 없을 때, 그때가 브랜딩이 힘을 발휘할 때이려나, 하는 가설을 세워봤다.

신용카드는 차별점을 만들기 어렵다. 모든 카드가 대부분 가맹점에서 결제할 수 있고, 어느 정도의 혜택이 있고, 다 비슷비슷하게 편하다. 그럼에도 신용카드는 엄청나게 많고, 경쟁이 너무 힘든데 계속 생겨난다. 말 그대로 포화상태다. 자연스럽게 내가 하는 업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마찬가지다. 앱 서비스도 포화상태다. 식당 예약, 세탁, 배달, 쇼핑, 금융 뭐 하나 떠올리더라도 대표적인 서비스 3개씩은 떠오른다.

금융을 예로 들자면, 10년 전엔 모든 은행의 계좌를 볼 수 있는 것은 뱅크샐러드, 토스 정도가 유일했다. 근데 이제 모든 은행사는 물론 네이버, 카카오처럼 범용적인 서비스에서도 그 기능을 쓸 수 있다. SNS도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이 유일하게 사진 필터를 제공하는 곳이었지만 이제 그냥 사진을 올릴 수 있는 모든 SNS는 다 필터가 있다. IT 서비스에서도 기능을 싸우는 시기는 지났다. 성숙한 시장에 접어든 신용카드처럼 말이다.

내 가설은 이럴 때 쓸 수 있는 무기가 브랜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 기능은 비슷하지만 그 중에서 내가 쓰는 것은 이거’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 그 결정은 브랜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그러다가 마침 (자는 동안 내 뇌를 해킹한 건지 유튜브가 추천한) 마크 저커버그의 인터뷰 클립을 보게 되었다. 좋은 제품(Good)과 진짜 대박인(Awesome) 제품은 다르다, 진짜 좋은 제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짤막한 대화였다. 그러게, 좋아서 쓰는 앱이 뭐가 있나. 이렇게 기능으로 싸우기 힘들다면 충성도로 싸울 수밖에 없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살아남을 서비스가 몇이나 될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앱이 별로 없다. (이메일 서비스 Hey, 집중력을 도와주는 Endel, 지금도 쓰고 있는 Notion…. 이 정도?)

좋아서 쓰는 제품. 그게 모든 서비스의 최종 목표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어떻게 좋아서 쓰는 제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 디자이너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아졌다.

아니 아니지, 그래서 레드를 받을 건가 말 건가, 그래 그것부터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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