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Off 기술

최근 몇 주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꼭 참석해야하는 일정이 없다면 주말과 평일의 구분없이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너무 지치면 자는 일상을 반복했다. 처음엔 몰입해서 일하는 것이 나름 재밌기도 하고, 열심히 한다는 생각에 내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는데 기간이 길어지니까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목과 어깨의 통증이 강하게 느껴지더니 생각도 이전보다 명료하지 않고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래서 안되겠다 싶어, 하루는 휴가를 쓴다 생각하고 재정비를 하는 하루를 보냈다.

재정비의 날엔 시간 내서 운동을 갔다 오고, 밀린 집안일도 하고 오랜만에 저녁도 요리해서 먹었다. 그러면서 원래 하던 건데 요즘에 안하고 있던 아주 사소한 것들을 떠올렸다. 이를 꼼꼼하게 닦는다거나, 샤워 후 바디로션을 바른다거나, 입었던 옷을 잘 걸어두는 일, 티백이 아니라 찻잎을 우려 마시는 것, 그래, 그런 것을 안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백그라운드에서 계속 회사 일을 생각이 돌아갔던 것 같다. 마치 하루종일 딴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특히 의식없이 반복적으로 하는 샤워나 설거지 같은 일을 할 땐 더 심했다. 그러면서도 더 몰입해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쉴 때도 일과 관련된 유튜브를 찾아봤고, 밀린 아티클을 꾸역꾸역 읽었다. 이해하면서 읽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지내다가 하루, 아예 일과 거리를 두니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딴짓 하면서 일 생각을 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 깊이 있는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내가 놓치고 사는 사소한 것들이 미련으로 변질되어 건강한 의사결정을 막을 것 같다는 우려다.

내 경우엔 딴짓하며 일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잠들기 전 아이디어가 좋았던 적도 없고, 지하철에서 내려야하는 정거장을 신경 쓰면서 일 생각을 하는 것은 소모적이었다. 그렇게 집중력이 분산된 상태에서는 생각이 구름처럼 뻗어나갈 뿐 논리적으로 이어지긴 어려웠다. 그 결과 생각은 또렷한 결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뭉게놓은 걱정으로만 남았다.

이렇게 살다보면 일상 생활을 대충 한다. 밥도 대충 먹고, 대충 씻고, 옷도 대충 입고 출근한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문득 내가 일만 열심히 한다고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하는 것이 독이 되진 않을까 무서워졌다. ‘넌 이렇게까지 24시간 고민하며 생각해봤어? 그러니까 내가 맞아’라는 고집이 되거나,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미련이 되어서 나보다 더 나은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On-Off를 잘하자는 것으로 이 우려를 결론지으려 한다. 사실 이 사태는 몇 달 전 결심 때문이다. 얼마 전, 쉴 때도 일과 관련된 아티클, SNS, 영상만 보는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몰래 노력해 왔는데, 이렇게 정신적, 신체적 문제가 생기니 나에겐 맞지 않는 방법인 것 같다. 그보단 의지력을 타이트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생산성을 키우는 시도를 해봐야겠다. 업무시간에 뽀모도로를 (이번엔 제대로) 시작해 보고, 개인 생활 루틴도 강화해 봐야겠다. 그리고 쉬는 시간을 꼭 만들어서 의도적으로 슬랙도 안 보고, 노트북도 안 켜야겠다. 날이 좀 풀리면 산책도 자주 해야겠으니, 이 결심이 지속되는 한 우리 강아지 호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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