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결과에 빨리 도달하게 하는 사람
3월 4주차 업무일지
최근에 런칭한 기능의 반응이 좋다. 해당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매일 늘어나고 있고 서비스 리텐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덕분에 회사 내부에서 피드백도 많이 들려온다.
“써보니까 이런 게 재밌네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이 플로우가 어색한 것 같아요. 이 상황에서 버튼을 누르면 저기로 가야하지 않을까요?”
등등…
그간 새로 런칭한 기능들은 내부 피드백도 잘 안 들어올 만큼 우리 팀만 알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의견이 들어온다는 것은 잘 되고 있다는 뜻이라 안도가 되기도 했지만, 너무 많은 피드백이 내심 피곤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어느 출근길엔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디자이너라고 어떻게 항상 좋은 UX 결정만 하나. 어떤 유저가 어떤 상황에서 쓸 줄 알고!’ 그러던 중 내 유치한 억울함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팀의 개발자가 들어온 문제 제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더해줬고, 갑자기 더 나은 솔루션이 파팍 생각이 났다. 그 짧은 출근길이 디자인 솔루션에 대한 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디자이너가 항상 최선의 솔루션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 디자이너에게 피드백을 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은 다 듣되 알아서 소화하고 결정은 오롯이 디자이너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종 외로웠고 다소 방어적일 때도 있었다. 아마 어떤 디자이너건 똑같지 않을까.
그러다가 저 출근길 이후엔 디자이너는 좋은 솔루션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솔루션에 빨리 도달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옮기게 되었다. 디자이너는 항상 아무 탈이 없고 지표가 좋은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UX 결정을 향해 갈 수 있도록 길을 닦는 사람이다.
방탈출 게임을 해본 적이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여러 명이 함께하는 방탈출 게임을 시작하면 들어가자 마자 단서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것도 봐야 할 것 같고, 저것도 챙겨야 할 것 같고 이 문제도 풀어야 할 것 같다. 그럴 때 방탈출 고수 한 명이 일단 이 자물쇠 풀고 저 단서는 챙기자. 지금 보이는 단서는 이 뒤에 나올 문제 풀 때 써야 할 것 같다고 정리를 한다. 그럼, 그제야 모두 첫번째 자물쇠를 푸는 것이 집중한다. 방탈출 고수가 직접 자물쇠를 풀 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풀 때도 있다.
이게 디자이너의 훌륭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우린 다 같이 UX 방탈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문제를 백로그에 쌓고 있으면, 디자이너가 일단 이 퍼널을 해결해야 한다고 집중시키고 디자이너 스스로 어느 정도 몇 단계의 UX 자물쇠를 풀어버려서 빠르게 다음 단계로 이동한다. 다음 어려운 자물쇠를 풀 때 팀의 직관을 함께 쓰이게 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홀로 결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솔루션에 빠르게 도달해야 하게 만드는 사람인 거다. 좋은 솔루션은 디자이너가 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것이고.
같은 방식으로 A/B 테스트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게 되었다. 솔직히 A/B 테스트를 할 때 모든 디자이너가 A, B 안 중 스스로 밀고 있는 안이 마음속에 있다. 우리 팀은 재미 삼아 어떤 것이 위너가 될 것 같냐고 슬랙에 이모지를 달아 결과에 베팅을 해보기도 하는데 내가 밀었던 안이 위너가 되지 않으면 ‘역시 결과는 모르는 거예요 ㅎㅎ’ 하며 웃지만, 솔직히 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다.
하지만 디자이너를 좋은 결론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결론으로 빨리 도달하게 하는 사람으로 역할을 바꾸면 A, B를 그려내고 테스트해서 더 나은 결론으로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성과가 좋지 않은 B 안을 그린 디자이너, 심지어 속으로 B 안을 밀고 있어서 스크래치가 난 디자이너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열어두고 A라는 결론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을 파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려면 물론 어느 정도의 의사 결정권과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도식으로 내 일을 이해하고 있다.
문제 제기와 솔루션을 누구나 낼 수 있지만 어떤 경우 그건 무척 파편적이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최단 거리로 최선의 솔루션을 내기 어렵다. 그때 디자이너가 지도를 그려서 헤쳐 나갈 수 있게 길을 터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갈림길에서 여러 방식의 피드백도 수용할 수 있고 결론을 꼭 디자이너 홀로 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제품 개발 항해에 우리 팀을 모두 태우는 편이 더 신이 나는 항해가 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