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런칭한 기능의 반응이 좋다. 해당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매일 늘어나고 있고 서비스 리텐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덕분에 회사 내부에서 피드백도 많이 들려온다.
“써보니까 이런 게 재밌네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이 플로우가 어색한 것 같아요. 이 상황에서 버튼을 누르면 저기로 가야하지 않을까요?”
등등…
그간 새로 런칭한 기능들은 내부 피드백도 잘 안 들어올 만큼 우리 팀만 알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의견이 들어온다는 것은 잘 되고 있다는 뜻이라 안도가 되기도 했지만, 너무 많은 피드백이 내심 피곤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어느 출근길엔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디자이너라고 어떻게 항상 좋은 UX 결정만 하나. 어떤 유저가 어떤 상황에서 쓸 줄 알고!’ 그러던 중 내 유치한 억울함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팀의 개발자가 들어온 문제 제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더해줬고, 갑자기 더 나은 솔루션이 파팍 생각이 났다. 그 짧은 출근길이 디자인 솔루션에 대한 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디자이너가 항상 최선의 솔루션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 디자이너에게 피드백을 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은 다 듣되 알아서 소화하고 결정은 오롯이 디자이너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종 외로웠고 다소 방어적일 때도 있었다. 아마 어떤 디자이너건 똑같지 않을까.
그러다가 저 출근길 이후엔 디자이너는 좋은 솔루션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솔루션에 빨리 도달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옮기게 되었다. 디자이너는 항상 아무 탈이 없고 지표가 좋은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UX 결정을 향해 갈 수 있도록 길을 닦는 사람이다.
방탈출 게임을 해본 적이 있다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여러 명이 함께하는 방탈출 게임을 시작하면 들어가자 마자 단서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것도 봐야 할 것 같고, 저것도 챙겨야 할 것 같고 이 문제도 풀어야 할 것 같다. 그럴 때 방탈출 고수 한 명이 일단 이 자물쇠 풀고 저 단서는 챙기자. 지금 보이는 단서는 이 뒤에 나올 문제 풀 때 써야 할 것 같다고 정리를 한다. 그럼, 그제야 모두 첫번째 자물쇠를 푸는 것이 집중한다. 방탈출 고수가 직접 자물쇠를 풀 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풀 때도 있다.
이게 디자이너의 훌륭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우린 다 같이 UX 방탈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문제를 백로그에 쌓고 있으면, 디자이너가 일단 이 퍼널을 해결해야 한다고 집중시키고 디자이너 스스로 어느 정도 몇 단계의 UX 자물쇠를 풀어버려서 빠르게 다음 단계로 이동한다. 다음 어려운 자물쇠를 풀 때 팀의 직관을 함께 쓰이게 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는 홀로 결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솔루션에 빠르게 도달해야 하게 만드는 사람인 거다. 좋은 솔루션은 디자이너가 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것이고.
같은 방식으로 A/B 테스트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게 되었다. 솔직히 A/B 테스트를 할 때 모든 디자이너가 A, B 안 중 스스로 밀고 있는 안이 마음속에 있다. 우리 팀은 재미 삼아 어떤 것이 위너가 될 것 같냐고 슬랙에 이모지를 달아 결과에 베팅을 해보기도 하는데 내가 밀었던 안이 위너가 되지 않으면 ‘역시 결과는 모르는 거예요 ㅎㅎ’ 하며 웃지만, 솔직히 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다.
하지만 디자이너를 좋은 결론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결론으로 빨리 도달하게 하는 사람으로 역할을 바꾸면 A, B를 그려내고 테스트해서 더 나은 결론으로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성과가 좋지 않은 B 안을 그린 디자이너, 심지어 속으로 B 안을 밀고 있어서 스크래치가 난 디자이너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열어두고 A라는 결론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을 파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려면 물론 어느 정도의 의사 결정권과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도식으로 내 일을 이해하고 있다.
문제 제기와 솔루션을 누구나 낼 수 있지만 어떤 경우 그건 무척 파편적이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최단 거리로 최선의 솔루션을 내기 어렵다. 그때 디자이너가 지도를 그려서 헤쳐 나갈 수 있게 길을 터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갈림길에서 여러 방식의 피드백도 수용할 수 있고 결론을 꼭 디자이너 홀로 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제품 개발 항해에 우리 팀을 모두 태우는 편이 더 신이 나는 항해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