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의 루틴
우리는 금요일을 사퀴테리 프라이데이로 정했다. 본격적인 시작은 장보기부터 시작한다. 일찍 일을 끝내고 와인샵에 가서 마실 와인을 신중하게 한 병 고른다. 한 병이란 게 중요하다. 처음엔 몇 병 사다 두려고 했는데 매주 그날 다 마셔버려서 다음 주에 또 가게 되는 것은 똑같았기에 과음 방지와 가계경제를 위해 한 병씩 매주 사기로 했다.
빵집에 들러서 바게트나 치아바타 같은 담백한 빵도 하나 산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전날 마켓 컬리로 주문해 둔 소금집 델리의 햄을 꺼낸다. 여러 가지를 시도해 봤는데 입맛에 맞는 것은 잠봉, 로지노, 코파다. 각자 좋아하는 치즈나 잼도 꺼낸다. 배우자는 스모크 치즈를 좋아하고 나는 브리치즈와 파르미지아노 치즈를 좋아한다. 올리브는 모두 좋아해서 넉넉하게 꺼내는데 나는 피클은 좋아하지 않아서 배우자 쪽으로 조금만 꺼내놓는다.
플레이팅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예쁘게 올려주고 싶어서 핀터레스트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서 따라 한다. 사퀴테리를 말아서 올리면 집어먹기도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와인을 마시며 일주일 동안 미뤄뒀던 수다를 정주행한다.
사퀴테리 프라이데이는 행복하게 살자는 다짐을 하면서 조용하게 끝날 때도 있고, 흥이 과한 날에는 음악을 틀고 (우리집 올타임 베스트는 윤도현밴드와 이승기의 노래다.) 얼굴로 립싱크를 하다 (두 가수의 노래 둘 다 실제로 부를 순 없다.) 지쳐서 끝난다.
삶의 권태기는 갑자기 찾아온다. 딱히 인생이 불만족스럽지 않지만, 이게 행복이라고 말하긴 애매할 때, 열심히 살아왔고 이룬 것도 많지만 이게 정말 원했던 것인지 내가 놓친 게 뭔가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울 때, 심지어 놓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 허기짐을 채우려고 친구를 만나고 놀다 돌아와도 막상 침대에 누우면 적막하고 외로울 때.
이걸 노잼시기라고 부르기도 하고 (유독 일할 때 느끼는 권태감이라면) 일태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얼마 전 읽은 책에선 ‘시들함’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시들한 순간은 아주 조금씩 나를 좀먹어서 생활을 황폐하게 만든다.
내가 찾은 꽤 괜찮은 방법은 정성스럽게 노는 것이다. 노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성스럽게’에 방점이 있다. 친구들을 초대해서 밥을 먹기로 했다면 굳이 레스토랑 코스 요리처럼 오늘의 메뉴를 인쇄해서 식탁에 놓아보는 것. 혼자 일기를 쓰기 위해서 굳이 조도를 조절하고 기분 좋은 향을 피우고 만년필의 잉크를 채우는 것. 집에서 뭘 시켜 먹을 수도 있지만, 굳이 공원에 가서 돗자리를 펴고 싸온 도시락을 먹는 것.
이런 부류의 일에는 다음에 굳이 더 잘해보고 싶어진다는 이상한 힘이 있다. 괜히 다음엔 메뉴를 인쇄한 정도가 아니라 초대장을 만들어보고 싶고, 더 예쁜 색감의 잉크를 사고 싶고, 더 완벽한 피크닉세트를 준비하고 싶어지는, 이상하게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굳이 열을 올리게 되는 것들이 냉랭한 생활을 서서히 데워주는 것 같다. 실제로 열심히 하다 보면 시들함이 잊히는 것을 경험했다. 가끔은 내 삶을 지배하는 생산성은 깡그리 무시하고, 아주 귀찮고 기쁘게 삶에 주어진 모든 사탕을 부산스럽게 까먹으며 부지런하게 살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