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드라마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학생 때 시험이 끝나면 일본 드라마를 몰아보는 것이 낙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땐 ‘고쿠센’을 시작으로 잠깐 애니메이션에 빠졌다가 미드의 세계에 입문했다. 고등학생 때는 바빠서 많이 못 봤던가. 아, ‘가십걸’이 있었구나. 수험생이라 죄책감을 느끼며 잠깐씩 보던 드라마였는데, 수능 끝나고 몰아봤었다. 나는 미대를 준비해서 수능 후 미술학원 특강을 들었는데 집에 오면 10시 20분쯤이었다. 빨리 잔다는 핑계를 대면서 방으로 들어가 몰래 한두 시까지 몰아보던 기억이 있다. 당시 쓰던 PMP의 인터넷 강의를 모두 지우고 8기가를 드라마로 채우는 게 얼마나 통쾌했던지.
대학을 간 첫 학기 종강 후에는 ‘뿌리 깊은 나무’를 봤다. 대학 첫 학기는 혼란스러웠고 나름대로 진통을 겪었다. 종강 후엔 아무렇게나 널브러지고 싶었다. 코스트코에 사온 치즈케이크를 퍼먹으며(코스트코 치즈케이크는 어마어마한 칼로리와 크기를 자랑한다) 거의 이틀을 아니, 48시간을 꼬박 봤던 것 같다. 그 뒤로 이건 내 종강 습관이 되어버려서 나의 통통한 스무 살에 일조했다.
또 뭐가 있었을까. 넷플릭스의 세계를 열어준 ‘하우스 오브 카드’. 드라마 속 인물들의 프로페셔널함에 반해 현실에서 그 비스무리한 행동을 따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뉴스룸’. 여러 번 돌려본 드라마는 뉴스룸이 유일하다. 각자 자기 일에 대한 자기 기준이 확실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팀워크. 그런 완벽한 팀을 이뤄 일해보는 것이 내 꿈이 될 정도로 애정하는 드라마다. 나온지 10년이 넘은 드라마라 OTT에서 볼 수 없게 되어서 DVD로 소장하고 있다. 일에 지칠 때마다 보는 여전히 최고의 드라마다. 최근엔 ‘테드 레소’에 지분을 조금 뺏겼지만.
또 작년에 본 ‘BEEF’도 있다. 그때 난 정말 힘들었다. 함께 창업에 실패한 후 비교적 성현이는 빠르게 기존 회사로 돌아갔는데 난 시간이 걸렸다. 자존감은 바닥이었고 우울증은 도져서 스스로 땅굴을 파고 있었다. 성현이는 그러고 있지 말고 차라리 게임을 하든 드라마를 몰아보든 그냥 놀라고 했다. 게임을 원래 좋아하지도 않고 그럴 기운도 없어서 넷플릭스를 켰다. ‘BEEF’는 아마 제일 많이 운 드라마이지 않을까.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순 있어도 소리 내서 꺽꺽 울면서 보진 않으니까. 그렇게 마음의 댐을 비우고 나니 좀 회복했던 것 같다. 굳이 수문을 닫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밖에도 뭐 많지. 내 연애보다 더 설레며 보던 ‘스물다섯, 스물하나’도 있었고 배우자와 같이 드라마를 보는 게 취미가 된 계기인 ‘멜로가 체질’도 있다. ‘멜로가 체질’에는 주인공 친구들이 저녁마다 치맥을 하는데 나도 질 수 없어 매화 체험형 드라마 시청을 했고, 배민 VIP에 등극했다. (한 손에 리모컨 한 손엔 맥주가 그렇게 위험하다.)
나 아무래도 드라마를 좋아하나보다. 이번 주에도 그랬다. 회사 잘 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노력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일했다. 그게 슬기로운 회사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사는 것이 시들하다 싶다가도 그냥 이런 대기업 회사 생활이 처음이라서, 어색해서 그런 거로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더 하고 싶은데 잘 안되고, 못 하겠고 여기서 인정받긴 그른 것 같다는 게 내 진짜 감정이었다. 내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꼈고 함께 일하는 팀원들은 차가웠다. 난 거의 두 달간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과일을 올려놓으려던 식탁 바구니에 소화제와 진통제가 쌓여있었다. 그것도 빈 껍데기가.
목요일 오후에 갑자기 오후 반차, 금요일 휴가를 내고 그냥 쉬었다. 재밌다던 얘기를 들은 게 생각나 ‘엄마 친구 아들’을 봤다. 여주인공은 잘나가는 미국 대기업(그레이프라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구글의 오마주다)의 PM으로 일하다가 번아웃을 겪고 한국으로 들어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첫 화에 극 중 엄마가 대책 없이 퇴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딸을 등짝 스매싱하면서 너 무슨 생각으로 퇴사했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여주인공이 이렇게 말한다.
“일단 잘거야. 알람끄고 밤낮없이 오래 잘거야. 그리고 나 맛난 음식 진짜 많이 먹고 싶어, 한식으로다가. 무조건. 아, 그리고 멍 때리고 싶어. 아무것도 안할거야”
그러니까 엄마가 이젠 아예 일어나서 사정없이 딸을 내리치는 코믹한 장면인데 그걸 보다가 울었다.
너무 잘 아는 마음이라서, 진심을 어리광 부리듯 부모에게 털어놓고 한 대 맞아야 오히려 마음이 편한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내가 엄마 만날 때마다 하는 일이었다. 엄마가 회사 잘 다니냐고 물어보면 하기 싫어 죽겠다, 재미없다, 힘들다, 내뱉던 그 말들 말이다. 엄마는 ‘너 또 성질머리, 회사에 다닐만하단 꼴을 못 봤어.’ 하면서 어깨를 찰싹 때렸다. 나 요즘 또 방황했다. 사는 게 헷갈리고 어려웠다.
그래서 갑자기 휴가를 쓰고, 아파도 꼭 가려고 했던 운동도 안 가고, 새해 결심 잘 지키려고 애쓰던 다이어트 식단도 내려놓고 맥주나 마시면서 드라마를 봤다. 한 시간을 꽉 채우는, 길게는 1시간 20분까지 이어지는 16부작을 다 보려니 바빴다. 금요일에도 새벽 3시에 잤고, 토요일인 오늘 드디어 마지막 화를 끝내니 벌써 3시다. 완주를 해냈다. 후련하다.
그리고 좀 나은 것 같다. 주인공이 잘나가던 직장 때려치우고 자기 꿈 찾아 요리를 시작하는 스토리가 진부하다, 진부하다 하면서, 결국 식당 차리겠거니 3회부터 짐작했으면서, 16부작을 허겁지겁 욱여넣었다.
나에겐 드라마가 필요한가보다. 자주 구렁텅이에 빠진 구원 한다. 꽤 쉬이, 꽤 재밌게. 한 시즌을 몰아보고 나면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상태가 된다. 드라마를 보는 건 방탕의 한가운데에, 탕후루급 과당에 나를 퐁당 빠뜨리는 일이자 밀물이 들어오는 갯벌에 버틸 수 있다고 서 있는 나를 껴안고 정신 차리고 빨리 뭍으로 뛰라고 하는 일이다. 드라마가 원래 이렇게 심오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나에겐 그런 일이 되었다.
세상에 볼 드라마가 많다는 것이 이렇게 두둑하게 위안이 되다니. 세상의 모든 OTT여, (나는 애플티비, 디즈니, 넷플릭스, 티빙, 쿠팡플레이를 구독한다) 부디 내 월급을 다 가져가시오, 당신들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
2025년 2월에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