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 중반이 되었다. 내 또래의 프로덕트 디자이너들과 얘기하면 공통적인 고민이 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누가 들으면 삼십 대에 은퇴해? 무슨 운동선수야? 하겠지만 우리의 사정이 있다.
일단 현업에서 4~50대 디자이너를 본 적이 별로 없다. (40대 초반 정도에 일하시는 분을 가끔 보는 정도) 연차와 나이가 쌓이면 매니저, 리더십 레벨로 올라가는 것도 일반적인데 디자이너가 갈 자리가 많지 않다. 개발자를 보면 회사별 차이를 차지하더라도 비교적 리더십의 레이어가 (FE Lead, Server Lead, Team Lead, Head of Tech 등…) 다양한 편이다. 게다가 CTO가 없는 회사는 없다. 반면 디자이너는 CDO가 없는 회사도 많고, 사내 총인원 자체가 많지 않다 보니 리더십 레이어가 단순하다. Senior Designer, Team Lead 정도가 다다. 그리고 신입 디자이너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올라갈 곳은 없고 아래에도 공급이 넘치는 거다.
디자이너들과 이런 고민을 교류하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회사 밖에서 돈 벌 궁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들 사이드잡을 가지고 있나, 나만 그냥 회사만 다니는건가 불안해졌다. 불안은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증폭되었고 파이어족이 되어야한다고 다짐하게 되었고, 커리어 허무주의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열심히 해도 5~6년 뒤면 안할 일인데 뭐 무리해서 애쓸 거 있나, 회사 밖에서 돈 벌기 위한 준비를 미리 하는게 중요하지 하는.
근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일이 전혀 재밌지 않았다. 일과는 불가근 불가원이 정도(正道)인데 너무 멀어져버리니 몰입도 안되고 일이 그저 돈벌이처럼 느껴졌다. 왜 그럴까 회고하다가, 깨달았다. 나는 사실 이 일을 되게 좋아하는 데 이 일이 의미가 없게 느껴지니까 괴로워졌다는 것을. 그리고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는 한 되게 잘해보고 싶다는 것도.
관심을 달리하니, 내 시간이 소중해지고 내 고민이 우스워졌다. 세상에 어떤 운동선수가 ‘나 5~6년 뒤에 은퇴할 거니까 지금 올림픽 안 나가도 돼, 은퇴 후 센터 차려야 해. 그게 더 중요해.’하겠는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내 뭐라도 더 달성하려고 하겠지. 근데 그 우스운 꼴이 나였다.
그래서 마음을 잡고 더 매진해 보려고 한다. 파이어를 하고 싶다는 결심은 유효한데 경제적 자유를 누린 뒤에도 계속 디자이너 일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결론이 달라졌다. 그만큼 꽤 좋아하는 일이니까. 한동안 생각이 너무 멀리 가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이루고 싶은 것에 초점이 흐려진 거다. 오랫동안 일하는 여성 디자이너이고 싶다. 멀리 간 잡생각 접어두고 당장 내일 더 나은 디자이너이고 싶다.
결국 우리가 가고 있는곳에 발자국이 남고 있음을.
모든 것을 놓고싶다가도 눈길에 푹 자리잡은 발자국을 따라 오는 사람이 있음을.
눈이 계속 내려 발자국이 눈에 덮히지 않도록 서로가 노력하고있음을.
더 오래 디자인을 하고 디자이너의 방법으로 조직을 만들어가야겠다 다짐하게 하는 뉴스레터였습니다 .감사해요.
일에 관해 언제나 공감되는 글들을 작성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슷한 불안감과 현실의 높은 벽들을 보며 자주 좌절하곤했는데, 어쩌겠어요. 다 울었으면 다시 열심히 일을 해야지.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은 정말이지 고통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