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글쓰기에 관해
"오늘 날씨가 좋았고, 7시쯤 퇴근을 했다. 저녁엔 라면을 먹었다”를 다른 문체로 써보게 했다. 너무 그럴듯하게 잘 쓴다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 않았고, 너무 다르게 쓴다는 것은 조금 놀라웠다.
김연수 작가의 스타일
퇴근길, 하늘이 너무 맑아서 오히려 슬펐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까.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정확하지 않을 뿐이다. 슬픔이라기보다는, 이런 하늘 아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퇴근뿐이라는 사실이 만들어내는 어떤 간극 같은 것. 그 간극 속에서 나는 잠깐 멈춰 섰다. 시계는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세상은 낮과 밤 사이 어디쯤에서 색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였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삼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야말로 하루 중 가장 정직한 시간이라는 걸, 나는 라면을 끓일 때마다 깨닫는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기포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하루를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사소한 끓어오름들의 연속이 아닐까.
면을 건져 올릴 때 국물이 조금 튀었다. 손등이 뜨거웠다. 그 짧은 통증이 오늘 하루 중 내가 가장 선명하게 살아 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는 걸, 나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맑은 하늘보다, 퇴근의 해방감보다, 손등 위의 작은 화상 자국 하나가 더 오래 남는 밤이 있다.
장류진 작가의 스타일
날씨가 좋았다. 좋았다는 건, 딱히 우산이 필요 없었고 코트를 입기엔 더웠고 셔츠 한 장으로는 약간 부족한 정도였다는 뜻이다. 그런 날씨에 대해 사람들은 보통 “완전 좋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표현이 정확히 뭘 가리키는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무튼 나쁘지 않았다.
일곱 시에 퇴근했다. 정시는 여섯 시인데 일곱 시에 나왔으니까 한 시간 야근을 한 셈이지만, 우리 팀에서 일곱 시 퇴근은 야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야근이라고 부르려면 최소 아홉 시는 넘겨야 한다. 이건 아무도 정한 적 없는 기준인데 모두가 알고 있다. 회사라는 곳에는 그런 규칙이 많다.
집에 와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계란이 두 개 남아 있었는데, 하나를 넣을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넣었다. 별것 아닌 선택인데 왜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계란을 넣으면 내일은 하나밖에 안 남으니까. 내일도 라면을 먹게 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내일도 라면을 먹게 될 거라는 전제가 자연스럽다는 게 조금 웃겼다.
라면은 맛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맛있다기보다는, 예상한 그대로의 맛이었다. 나는 예상한 그대로인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오늘 하루가 딱 그랬다. 특별히 좋지도, 특별히 나쁘지도 않은. 그런 하루에 대해 뭔가 의미를 붙이려는 시도 자체가 과잉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국물을 다 마시고 냄비를 싱크대에 넣었다. 설거지는 내일 하기로 했다. 이것도 매번 하는 결심이다.
김영하 작가 스타일
날씨가 좋았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날씨가 좋다는 것이 나의 하루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나는 아침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저녁에 나왔다. 그 사이에 하늘이 어떠했든 나는 알지 못했다. 퇴근길에 올려다본 하늘이 맑았으므로 나는 오늘 날씨가 좋았다고 판단했다. 증거는 그것뿐이다.
일곱 시였다. 여섯 시에 나올 수 있었지만 나오지 않았다. 왜 나오지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할 일이 남아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할 일이란 하기로 결정하면 생기고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다. 나는 여섯 시에 하지 않기로 결정하지 못했고, 일곱 시에야 결정했다. 그 한 시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집에 돌아와 라면을 끓였다. 요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불을 사용하고 물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행위다. 물은 끓었고 면은 풀어졌고 나는 그것을 먹었다. 이 과정에 어떤 의지가 개입했는가. 아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가 고팠고, 라면이 있었고, 냄비가 있었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행위는 저절로 발생한다. 우리는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의 선택은 이미 끝나 있다.
싱크대에 냄비를 놓았다. 내일 아침에 이 냄비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조금 원망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일의 나에게 관심이 없다. 이것이 야만인지 자유인지 나는 판단을 유보한다. 오늘 하루에 대해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날씨가 좋았다. 퇴근을 했다. 라면을 먹었다. 이 세 문장이면 충분하다. 어쩌면 이 세 문장조차 과잉일 수 있다. 살아 있었다. 이 한 문장이면 된다.
클로드가 나보다 내 일기를 더 잘 써준다고 해서, 그 일기에 적은 내용이 나의 하루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AI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은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의 주체성을 갖는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생각의 주체성을 갖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씀으로써 완성된다.
다시 글을 잘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일상에 관한 에세이든 일과 관련된 기록이든 상관없다. 에세이라면 나는 일상을 나의 취향대로 더 선명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 같고 일과 관련된 저널이라면 좀 더 논리적으로 일하게 될 것 같다.
생각정리에 도움을 준 글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 - Paul Graham
글쓰기는 생각하는 것이다 - Nature Reviews Bioengineer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