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할 수 없는 숫자를 상상하기
8월 2주 업무일지
요즘 내가 키우고 싶은 능력은 상상력이다. 눈에 당장 보이는 숫자를 떠나서 ‘이렇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식의 솔루션을 생각하는 것을 UX 상상력이라고 부르기로 정의했다.
모든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임팩트를 추산해 보는 편이 좋고 그 추산은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계산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상승분이 크지 않은 구간이 온다는 것이다. 완전히 처음 시작하는 제품이라면 모를까 어느 정도 성숙한 제품의 경우 퍼널 개선, 전환율 개선 등은 한 자리 숫자의 개선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수치로 보면 그것만으로도 임팩트가 큰 경우도 많겠지만 (거래액이 매월 100억 원인데 1%만 구매 전환이 개선해도 1억을 더 버는 거니까) 그게 정말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까, 디자이너가 더 큰 임팩트를 낼 수 없을까 고민이 된다. 그런 생각의 끝에 난이도가 높은 디자인은 오히려 상상할 수 없는 숫자를 상상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예측 가능한 숫자만 생각하며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면 숫자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변화가 있으면 당연히 어떤 지표는 떨어지고 어떤 지표는 올라갈 수 있다. 예를 들어 트래픽이 가장 많은 홈을 바꾸려는데 각 이해관계자가 1%p의 양보도 없이 모든 요소의 ctr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지면을 만들어 달라는 것은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안에 갇힌 디자이너는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매우 작은 단위의 실험 밖에 할 수 없게 되고 이건 무척 답답한 상황이다. 이게 예측 가능한 수준의 변화, 최적화를 위한 개선의 마지막 모습이다.
반면 예측 불가능한 개선은 없던 것을 내놓는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잃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몰랐던 것, 보지 못했던 새로운 국면을 여는 것이다. 이런 예측 불가능한 변화는 UX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아까의 예시를 이어가자면 홈의 레이아웃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메뉴를 다 없애버리고 채팅형으로 바꿔 보는 것은 어떨까, 음성을 넣어 볼 수 있을까, 혹은 다 없애고 하나만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상상이 될 수 있겠다. 잠재력은 예측의 오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변화의 결과도 진폭을 예측하기보단 시도가 유의미해진다.
이 상상력의 강점은 최적화의 한계에 부딪혀서 이제 여기서 1%의 개선밖에 할 수 없을 때 새로운 고점을 뚫어 줄 수 있다는 것이고 아주 취약한 단점은 공격받기 너무 쉽다는 것이다. 혁신은 100개쯤 실패하고 1개쯤 성공할까 말까 하니까. 어떤 사람은 ‘이걸 또 왜 해?’ 생각할 수 있고, ‘저번에도 이상한 것 했다가 실패했잖아’하는 팀의 불신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최적화의 유리천장에 막혔을 때 그 이상을 해내는 것은 아주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그리고 이 상상력이야말로 디자이너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최근에 상상력을 키워 보려고 실제로 개발하지 않을 시안을 그리는 시간을 늘렸다. 아주 웃긴 것을 그려 보는 것을 우스워하지 않기로 했다. (실제로는 금융 불완전 판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되겠지만) 틱톡의 왕홍이 옷을 팔듯이 라이브 커머스처럼 금융상품을 소개하면 어떨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도 하고 자산관리의 오토 파일럿은 무슨 모습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두 번째도 물론 투자 라이선스 같은 장벽에 부딪혀 실제로 되진 않을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 보면 그중 꽤 현실적인 타협안이 나오기도 하고 실제로 최적화의 고점을 뚫어 내기도 한다. 예전에는 이런 상상력만 있는 시안을 보고 저건 그냥 마음대로 그린 거네, 현실적이지 않은 초보 디자이너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솔루션을 내는 것이 더 노련한 디자이너라고 생각해 그런 디자이너가 되려고 노력하기도 했으나, 돌고 돌아 요즘은 다시 현실 파괴적인 상상을 하는 것이 결국 새로운 미래를 가져오는 일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잃는 것을 최소화하는 디자인이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 엄청 큰 얻을 것을 상상하는 디자인을 언젠간 성공해 내고 싶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