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을 반품하기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난 자주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쇼핑을 한다. 밤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알면서도 열두 시가 지나면 할인이 끝난다는 말은 쉽게 포기가 되지 않는다. 그날은 검은색 홀터넥 셔츠를 구매했다. 다음 날 출근길에 들여다보니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반품하려는데 이미 배송을 시작했다고 하여 취소할 수도 없었다. 하루하고 반나절이나 걸렸나. 금세 문 앞에 도착했다.

받아버렸으니 입어 나보자 했는데 역시나, 어울리지 않았다. 검은색이 원래도 잘 어울리지 않는데 홀터넥이니 더욱 얼굴만 도드라졌고 얼굴과 팔이 완전히 시각적으로 해체되어 동동 떠다녔다. 다시 고이 상자에 넣어 반품 포장을 하는 나를 보며 배우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인정한다. 예뻐 보여서 샀다. 모델이 입고 있는 사진이 너무 트렌디했고 나도 입으면 혹시나 비슷할 줄 알았다. 나의 것이 아닌 분위기가 탐이 났던 것이다. 이런 일 나의 삶에서 곧잘 반복된다.

괜히 공개 인스타 계정으로 팔로우하는 것이 부끄러워 비공개 계정에서만 팔로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란데클립의 디렉터 김규림 님과 작가 무과수 님, 틱톡의 마케팅 리드 이소라 님이다. 이 사람들 정말 커리어가 멋지구나, 내 롤모델을 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팔로우를 시작했다. 이게 얼마나 허무한 소린지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저 분들은 별로 공통점이 없다. 일과 개인의 경계 없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디렉터, 자신만의 분위기와 감각으로 팔로워를 모은 인플루언서, 외국계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은 비지니스 우먼. 난 이 중 대체 어떤 길을 가고 싶다는 건가.

그래, 탐났다. 예뻐 보여서 어울리지도 않는 홀터넥 셔츠를 산 것처럼 말이다. 나의 장점, 내가 살아온 방식과 전혀 다른 삶을 욕심 내다 보니 막막하기만 했던 것 같다. 나는 저렇게 될 수 없을 것 같고, 그러려면 이미 이십 대부터 될성부른 떡잎이 보여야 했던 것 같고, 그렇다면 나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욕심낸 대가다.

롤모델을 반품하기로 했다. 멋있어 보이는 것 말고 내가 편안하고 행복한 것을 취하기로 했다. 내게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더 발전하는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명확해 보였다. 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도전해 보고 싶은 일도 생겼다.

사람은 역시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무턱대고 저런 것을 나도 해보고 싶다고, 안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세상에 졸라봤자 나만 지치고 초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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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처음은 욕심만큼 못해

잘 해내고 싶어서 욕심을 부릴 때가 있다. 하지만 욕심만큼 잘 해내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내 욕심은 100에 있는데 실제로 할 수 있는 건 80정도 성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주 인터렉션을 매끄럽게 잘 만들고 싶은 화면이 있었다. 레퍼런스도 엄청나게 찾아보고 계속 파고들면서 이것저것 시도해 봤는데 결론은 허무하게도 복잡한 효과가 들어가지

회사 안의 내가 행복해야 회사 밖의 나도 행복하다.

참여하는 디자이너 스터디가 있다. 한 달에 한 번 책이나 특정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지난 12월에는 연말답게 1년의 디자인 작업을 돌아보며 어떻게 일을 할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직장인으로서 누구나 빠지기 쉬운 순환 고리를 알게 되었는데 흐름은 이렇다. * 의욕적으로 회사 일을 열심히 하고 스스로를 갈아 넣는다. * 하다 보면 내 선에서

신뢰의 와우 모먼트

많은 영역이 직감으로 작동한다고 믿는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첫인상이 오래 가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에 신뢰도 선형적으로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저가 어떤 서비스의 가치를 깨닫고 계속 쓰게 되는 순간을 와우 모먼트라고 말한다. 이 공식은 디지털 제품이 아니더라도 모든 경험에 존재한다. 고생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