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렁한 결심

최근 나의 삶을 극단적으로 바꿔준 요물이 있다. 바로 오닉스 팔마다. 휴대폰 사이즈의 작은 이북 리더기인데, 리디 페이퍼와 킨들을 써도 책을 안 읽었던 나로선 큰 기대는 없이 적어도 조금은 인스타그램을 멀리할 수 있을까 싶어 샀는데 대박이다. 한 달간 팔마로 출퇴근길에서만 4권을 읽었다.

나의 독서 루틴은 이러했다. 아침에 출근길에 약 30분 정도 에세이나 지식 전달 목적의 사회과학책을 읽는다. 특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에세이(최근에 ‘영어, 이번에는 끝까지 가봅시다.’을 읽었다)를 읽으면 활력이 솟는다. 퇴근길에는 소설을 주로 읽는다. Endel에서 릴렉스 사운드를 틀고 읽으면 아주 힐링이 된다. 그조차 힘들면 오디오 북을 듣는다.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퇴근길에 읽던 소설 중 너무 흥미로운 파트에서 홍대입구역에 도착해버렸다. 집에 가면 또 집에서 할 일이 있어서 더 읽을 순 없었고, 다음 날이 되었는데 출근길에 소설을 이어서 읽을 것인가, 평소처럼 사회과학책을 읽을 건인가 심히 고민이 되었다.

출근길에 에세이와 사회과학책, 퇴근길에 소설책으로 정했던 나름대로 심오한 이유가 있었다. 출근길에는 열심히 살기 위해 동기부여를 해줄 만한 책 또는 똑똑하게 만들어주는 책을 읽자고 생각했고, 퇴근길에는 메마른 감수성에 물을 주자는 계획이었다. 근데 갑자기 재밌는 소설이 등장해서 내 루틴을 망가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아침에 어떤 책을 읽을지 결정하는 것은 참 작은 일이지만 나에겐 내 기준을 고수할 것인가, 새로운 기준을 만들 것인가 아주 단호한 결심이 필요했다.

우습게도, 결론은 아무거나 읽자는 것인데 여기까지 도달한 과정이 스스로 기특하기 때문에 적어본다. 책을 읽는 것으로 대단한 무언가를 얻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것 저것 읽으면 약간 똑똑해지겠지만 모든 책이 참고서도 아니고, 지식 충전을 위한 극강의 효율을 내는 책만 골라서 읽을 수 없다. 그러면 팔마의 효과고 뭐고, 책 읽기가 지겨워질 것이 뻔하다. 재정의한 책 읽기의 목적은 잘 쓰인 문장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이다. 책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읽는 것도 책 읽기다.

평소에 글은 정말 많이 읽지만, 잘 쓰인 문장을 읽는 것이 별로 없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글들은 주술 구조가 맞고, 문장력이 대단하다기보다 감성이 대단하다. 회사 메신저 슬랙에는 글이 항상 쏟아지기 때문에 정말 많은 것을 후루룩 소화해야 하지만, 이건 거의 구어체에 가까우니까 이때 마주하는 글은 잘 정돈된 문장이기보단 생동감 넘치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글이다. (이모티콘이 없으면 반쯤 해석이 안 되는 정도의 생동감!)

그래서 따지고 보면 정돈된 문장을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요즘 블로그를 쓰면서도 내 문장력이 답답했는데, 평소에 말이 되는 문장을 자주 접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아침저녁으로 작가가 고민하고 편집자가 교열을 마친 퀄리티 높은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독서가 의미 있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난 글을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있으니, 책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그러니 아무거나 읽고 싶은 것을 읽어도 되겠다. 아, 너무 후련하다.

문득 또 아침에 읽은 장기하의 에세이가 떠오르고 너무 가져다 쓰기 좋은 문장이 떠오른다. 그래, 뭘 읽든 상관없는 거 아닌가. 역시 아무거나 읽든 도움이 된다.

Read more

확실한 말을 하는 사람

나는 확실한 말을 하는 사람이고자 한다. 져주는 듯이, 내가 잘못을 그럴 수밖에 없었던 듯이 흘려보내는 것은 너무 쉽다. 어른이라면 이 정도로 알아듣고 넘어가자는 태도로 성숙하게 ‘그땐 그렇게 말하셔서 이런 뜻인 줄 알았어요’, ‘알겠어요, 그건 제가 오해한 게 맞는 것 같네요’. 라고 말하면 된다. 그럼 적당히 체면을 깎지 않는 선에서 ‘나는

규격에서 벗어나기

얼마 전에 이사했다. 이전 집과 주방 구조가 특히 달라 고민했다. 냉장고 옆자리에 김치냉장고를 넣을 만한 자리가 있는데 난 김치냉장고 안 쓰니까 그곳에 원래 쓰던 전자레인지 수납장을 놓으면 되겠거니 계획했다. 미리 폭의 크기를 재어보는 꼼꼼함까지 부렸는데 막상 가져와서 설치하니 애매했다. 폭만 맞고 뒤에 공간이 남았다. 30센티 정도.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뒤에

좋아서 쓰는 제품

이번 주말에는 현대카드에서 주최하는 이벤트인 다빈치 모텔에 다녀왔다. 언제부터 현대카드를 썼더라. 대학생 때 외국 디자인 서적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가고 싶어서 현대카드를 만들었다. 그땐 어렸을 때라 연회비가 가장 싼 카드를 골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고메위크에 관심이 갔고(번번이 예약은 실패했지만), 예쁜 카드 플레이트를 갖고 싶었고, 코스트코가 필요했고,

똑똑한 디자이너에 대한 환상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이 똑똑함이라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이 진짜 능력이다. 디자이너에게도 마찬가지다. 제품 전략을 세우기 위해 시장을 면밀하게 분석한 자료, 빈틈없는 경쟁사 비교를 몇 페이지에 나눠 설명을 듣고 있으면 너무 많은 숫자와 그래프에 압도당해 그걸 잘 이해하는 사람이 똑똑한 디자이너인 것 같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래서 해결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