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격에서 벗어나기

얼마 전에 이사했다. 이전 집과 주방 구조가 특히 달라 고민했다. 냉장고 옆자리에 김치냉장고를 넣을 만한 자리가 있는데 난 김치냉장고 안 쓰니까 그곳에 원래 쓰던 전자레인지 수납장을 놓으면 되겠거니 계획했다. 미리 폭의 크기를 재어보는 꼼꼼함까지 부렸는데 막상 가져와서 설치하니 애매했다. 폭만 맞고 뒤에 공간이 남았다. 30센티 정도.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뒤에 공간이 비어 있는 이상한 형세가 되었다.

어떻게든 해야겠다 싶어서 ‘오늘의 집’을 구경하는데, 냉장고 옆자리에 딱 맞게 나온 수납장이 득실득실했다. 일명 비스포크 수납장. 비스포크 냉장고와 딱 어울리게 나온 수납장으로 전자레인지와 토스터, 와인잔이 넉넉하게 들어가면서도 상단에 조명까지 켤 수 있는 멋진 가구였다. 가격은 30-40만 원대. 더 비쌌으면 그래, 그냥 쓰자 했을 것이고 더 쌌으면 바로 샀을 것 같은데 단박에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가격이다.

일단 돈 나갈 곳이 많으니까 살다가 바꾸자, 저건 나중에도 바꿀 수 있는 가구다 이렇게 합리화하면서 버틴 지 한 달이 되었다. 한 달간 주말에 틈틈이 잔짐을 정리했다. 원래 붙여뒀던 포스터는 어디에 붙일지, 작은 소품들의 위치는 어디가 적당할지 시간을 들여 결정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퍼펙트 데이즈’의 포스터 자리를 찾다가, 그 애매한 전자레인지 수납장 위에 걸어뒀는데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뒤에 공간이 남는 건 이제 모르겠고, 신경 쓰이지도 않고, 볼 때마다 ‘아 맞아, 저 영화 좋았지.’라는 생각만 든다.

아직도 어색한 수납장은 맞다. 뒤가 비어 있는 수납장이라니. 그래도 이제 비스포크 수납장으로 바꾸진 않을 것 같다. 이토록 애매하고도 마음에 드는 공간을 보면서 양식화된 예쁜 집은 좀 덜 멋지지 않나 생각한다. (이사를 앞둔 대부분 사람이 공감할 테지만) 오늘의 집을 매일 드나들면서 팬트리는 이렇게 정리해야 하네, 냉장고 옆엔 이런 딱 맞는 제품이 있네, 요즘 소파는 이렇게 배치해야 하는구나 배운다. 하루 종일 들여다보면 ‘이렇게 하고 싶다’를 넘어서 이렇게 ‘해야하네’가 된다. ‘해야된다’를 따라서 만들어진 집은 아무래도 좀 지루하지 않나.

“따라 하면 오리지널리티가 생기진 않는다.” 내가 한 생각은 아니고 들은 (뼈 아픈) 얘기다. 요약해서 전달하자면 ‘어떤 사람이 (프리랜서라고 가정) A로 성공하면 계속 다른 일이 들어오는데, A’ A’’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근데 A’ A’’는 절대 A가 될 수 없는데 그 사람한테 B를 만들어달라고 하지 왜 A’를 요구하나. 그런 걸 트렌드를 만들어간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트렌드는 다른 트렌드에 진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비스포크보다 더 나은 냉장고가 나올거고 그 옆에 놓는 다른 수납장은 씨스포크든 디스포크든 또 나올 거다. 그걸 따라가기보다 그냥 퍼팩트 데이즈 포스터가 걸려있는 크기도 안 맞는 이름 없는 수납장이 낫지 않나. 뭐 내가 주방 수납장으로 트렌드를 이끌어갈 필욘 없지만 말이다. 적어도 소파는 부클레 소재여야 하고, 책상엔 아르떼미떼 조명이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고, 수납장은 USM이어야 하는 세계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은 누릴 수 있지 않나 하는 말이다.

이건 좀 용기가 필요한데 안전한 양식을 택하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조금 다르게 해보려고 시도한 것인데 독특하지 않고 괴기할 수 있다. 그래도 실패를 안고 갈 수 있으면 (뭐 집 인테리어가 좀 이상하더라도 집이 무너지는 건 아니니까) 시도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용기의 용량만큼 멋있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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