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트리 정리함, 흐트러지지 않으리라

지금 사는 집에 이사온 지는 2년 정도 되었다. 처음엔 깔끔했는데 살다보니 삶의 부산물이 쌓여 예전같지 않아졌다. 이 정도면 필요한 만큼은 쌓아두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창고는 선풍기와 가습기같은 계절 가전들과 대량으로 구매한 화장지, 세제로 발디딜틈이 없어졌다. 정리가 필요했다.

로망이 있었다. 동일한 색상과 규격의 정리함으로 창고를 정리하는 것.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막상 정리함을 구매하려고 보면, 생각보다 무척 많이 필요하다. 한 3개면 되려나 싶어서 어떤 것을 넣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3개론 턱없이 부족하다. 쇼핑몰 사진처럼 모든 것을 같은 정리함에 넣으려면 창고를 가득 채울만큼의 정리함이 필요하다. 구매창에 필요한 갯수를 입력하면, 이 정도면 수납장을 사겠다 싶을 정도의 금액이 뜬다. 그래서 엄마들이 우유팩을 씻어서 접고, 패트병을 잘라서 정리함을 만들었나 싶다. 그들의 지혜에 감탄하며 나도 다른 가구를 살 때 달려온 작은 박스들과 선물이 들어있던 케이스들로 나름대로 정리하고 살았는데 그건 현실이지 로망이 아니다. 창고가 정리되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 같고, 왠지 스트레스가 낮아질 것 같고, 내 삶이 한껏 멋있어질 것 같다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열 가지쯤 찾고는 정리함을, 주문했다.

이틀 정도 걸려서 정리함에 모든 물건들을 넣어서 정리했다. 정말로 깨끗하고 밝았다. 투자해서 만들어낸 결과인 만큼 절대 이 깔끔함을 흐트리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이제 어떤 것도 쟁여둘 수 없었다. 그냥 사서 창고에 처박아둘 수가 없었다. 휴지를 사도 싸다는 이유로 24개씩 살 수가 없어졌다. 그러면 휴지를 보관하는 공간에 모두 넣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간에 넘치게 산 물건들은 옆 물건의 공간을 침범할 것이고, 카오스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세제를 두 세개씩 살 수 없어졌고, 주방 세제를 열 두개씩 사둘 수 없어졌다.

깔끔한 상태를 흐트리지 않고 살려면, 필요한 만큼만 쌓아두는 준비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3개월 뒤에 휴지 대란이 일어날 일도 없고, 갑자기 세제가 비싸질 일도 없다. 당장 쓸 물건이 없지 않을 정도로, 약간의 미래만 걱정하면서 대비해놓으면 된다. 그렇게 보니, 팬트리를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심오한 일이었다.

요즘은 미래에 대한 대비도 아주 욕심을 부려서 했다. 앞으로 이런 커리어를 이어갈거고, 그래서 이런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데 플랜 A가 안되면 플랜 B를 할거고 그게 아니라면 C, D,...하면서 Z까지 간 것 같다. 경제 계획도 그렇고 노후도 벌써 대비하려고 했다. 내 마음 속에 걱정 창고는 모두 각자의 칸을 넘쳐서 아주 정리가 안되는 카오스가 되고 만 것이다. 걱정도 욕심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너무 욕심내서 하지 말자. 약간의 미래만 대비하자. 5년 후에 누렇게 바래버린 휴지를 쓰지 않으려면 여러모로 3개월치만 사두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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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에 대한 생각들

1. 흑백요리사가 여전히 화제다. 하도 여러 셰프들이 이렇다, 저렇다 해서 질릴 만도 한데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사람은 에드워드 리 셰프다. 어떻게 사람이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오지. 유퀴즈에 출연한 것을 봤는데 요리를 퍼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걸 여기로 옮기고 저걸 저렇게 하면 어떻게 되지?’하는 마음으로 본다고, 요리 앞에선 어린아이가 된다고

시들함은 해롭다

‘무엇이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즐겨보는 ‘장동선의 궁금한 뇌’에서 소개해서 읽게 되었다. 책에서는 ‘시들함’이라는 마음 상태를 정의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활력을 찾는 방법을 말한다. 마침, 당시 내 감정 상태도 딱 그러해서 공감하면서 읽었다. 책의 내용을 빌리자면 시들함은 다음과 같다. *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으니 축복받은 셈이라고 생각하면서 불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