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근로자
나는 멘탈이 강한 편은 아니다. 오히려 연약한 편에 가까워서남들보다 더 멘탈 단련에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다. 창업을 접기로 하고 회사로 다시 돌아가려는 지금, 나의 멘탈이 약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어려운 점은 이것이었다. 나는 지난 6개월간의 창업이 최근 몇 년 중 가장 배운 점이 많고 가장 나를 바꾼 시기인데 이력서에는 짧은 창업과 실패, 이 한 줄로 끝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6개월의 도전이 짧다고 느껴질 수도 있고 성과가 없으니까 그냥 쉬고 멋있게 포장한 것 아니냐고 오해를 할 소지도 있다. 이걸 이력서에 대고 구구절절 내가 이런 시기를 보냈고요, 이런 것을 배웠어요 하기엔 구차하고 아무 말도 안 하기엔 없어 보인다. 이런 나의 실제 경험과 문서에 적을 수 있는 텍스트 사이의 간극이 요즘 내 괴로움의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내가 우스워졌는데, 창업을 하는 6개월 동안 받았던 스트레스와 막막한 미래에 비하면 이정도의 괴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고민은 ‘우리 팀 이러다가 다 고꾸라지는 것 아닌가?’, ‘내 인생 어떡하나?’, ‘밥값은 벌 수 있나?’ 같은 끝도 없는 막막함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더 좋은 회사로 가면 좋겠는데’, ‘더 나은 조건이면 좋겠는데’ 정도니까 이전처럼 괴로움의 끝이 인생이 다 뒤집어질 막장까지 치닫지는 않는다. 근데 왜 지금이 더 괴로웠을까.
응석을 부렸던 것 같다. 창업을 할 때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여기저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팀과 함께 우리만의 길을 헤쳐 나가야 하니 멘붕이 사치였다. 괴로움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부작용 없이 잘 견뎌내기에 집중했던 것 같다. 근데 일단 후퇴를 하고 베이스캠프에 들어오니까 돌아가는 길이 험난할 것 같고, 생각해 보니 전쟁터에 있을 때 내 마음이 좀 다친 것도 같고, 아무튼 응석이 늘었다.
응석은 누울 자리를 보고 뻗는 것이니, 어느 정도 아마추어 같은 구석이 있다. 그래, 나는 프로 창업가에서 아마추어 근로자로 나도 모르게 태세를 바꾼 것이었다. 창업가와 근로자 사이의 전환이 너무 커서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그사이에 프로와 아마추어의 전환도 어물쩍 생겨버린 것이다.
당연히 아마추어보단 프로가 낫다. 프로 창업가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자료가 있기에 명확한 롤모델과 지침도 있었다. EO, YC 유튜브만 봐도 창업이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뎌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기꺼이 해내겠다는 마음으로 창업에 임했던 것 같다. 더 어려운 것을 해낼수록 더 프로 창업가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프로 근로자는 글쎄. 좋은 본보기가 드물다. (솔직히 말하건대) 블라인드를 보면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것만이 프로 근로자의 덕목 같고, 인스타그램을 보면 회사보단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프로 근로자 같고, 링크드인을 보면 나를 잘 포장하는 것이 프로 중의 프로 같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러운 기준들을 헤매며 프로 근로자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한 채,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프로는 아닌 근로자로 태세를 전환해버린 것이다.
프로 근로자가 되기로 결심한 다음, 내가 생각하는 프로 근로자는 이렇다고 본다. 장인이 도구를 탓하지 않는 것처럼 프로는 프로젝트와 팀을 탓하지 않는다. 임팩트가 적은 유지보수 프로젝트라서, 탐탁지 않은 팀원들과 함께 해서 성과가 안 좋았다 같은 변명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하며 경험하는 잡음과 멘탈 붕괴쯤은 당연히 업무와 동반되는 것으로 여기고 어떻게 하면 프로페셔널하게 견뎌낼지 고민하는 것이 프로 근로자의 모습 같다.
프로가 되겠다는 결심은 회사의 충실한 개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직원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다. 프로 근로자가 되려는 이유는 더 건강하게 일하고 싶어서이다. 창업가일 때 더 막막한 고민을 견뎠지만 지금이 더 힘들었던 것처럼 마인드셋만으로도 쉬운 게 어려워지기도, 어려운 것이 쉬워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로 근로자가 되자. 그게 정신 건강과 성장에 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