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을 곳에 제대로 심어진 기분
오랜만에 옛 동네에 왔다. 3달 전 이사를 했는데 그 이후로 처음 오는 것이다. 이사한 곳과 예전에 살던 곳은 분위기가 꽤 다르다. 지금 사는 곳은 새로 지은 아파트가 즐비한 흔히 말하는 살기 좋은 곳이라면 이전에 살던 곳은 모든 것이 좀 낡았고, 불편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재밌는 동네였다.
남편이 원래 다니던 바버샵에서 머리를 자른다고 해서 따라 나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늑함을 느껴버렸다. 사실 몇 개월 지난 것도 아닌데도, 익숙하게 다니던 골목을 맞닥뜨리니 갑자기 마음이 훅 누그러졌다. 아, 여기지. 여기 살았었지 하는 마음. 그래, 이전 동네에 살던 땐 그런 기분이 있었다. 회사에서 치이고 뭘 잘못한 것 같아도 홍제천에 내리면 여긴 나를 받아줄 것 같은 기분. 심어야 할 곳에 제대로 심어진 기분.
이사를 할 때, 이직을 할 때, 나를 종종 화초라고 상상해 봤다. 얠 어디다 심어야 환경이 잘 맞을까 생각하면서. 이렇게 보면 맞는 결정을 직감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지금 있는 곳은 뭐랄까, ‘앤 원래 해를 많이 받으면 쑥쑥 잘 자라는데, 적당한 그늘에서 키워도 되긴 해’에서 적당한 그늘에 들어맞는 곳이다. 지금은 화초를 그늘에서 키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여기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더욱 앞으론 올바른 곳에 심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들자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지금 준비된 마땅한 흙이 없다거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떠밀려 심지 않으려면 준비도 해두고 욕심도 내려놓아야겠다. 사는 데 대단한 것이 필요하다기보다 올바른 곳에 잘 심겨 있기만 하면, 그걸로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나서, 내친김에 화분을 하나 들였다.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라 마침 적당한 장소가 생각나서 골랐는데 사장님이 이 나무가 크면 이렇게 된다고 꽤 다르게 생긴 키 큰 친구를 보여줬다. 쑥쑥 잘 자라는 식물이라 금방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빨리 키우고 싶지 않으면 적당한 그늘에서 키우시면 돼요. 가지치기도 해주고요. 그럼 이렇게 자라요." 하면서 몸통이 도톰한 또 다른 친구를 보여주셨다. 내가 고른 아이가 줄기에 잎이 달려있었다면, 그 친구는 줄기가 아니라 가지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웃자라지 않기 위해, 필요한 적당한 그늘. 그것도 참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마저 들었다.